설교 & Podcasting2018. 6. 15. 16:09

 

허락하지 아니하고 / 마태복음 1821~35

 

  모파상이 지은 목걸이라는 소설을 보면, 마틸드 르와젤이라는 여인이 주인공인 소설인데, 이 여인은 세련되고 주목받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 꿈이었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말단 공무원이었다. 말단 공무원과 결혼하니까 세련되고 주목받는 삶을 살고 싶은데 현실은 안되어 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자 친구들을 만나고 오면 절망과 비관하는 삶을 마틸드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육부 장관이 공무원 부부를 초청했고 마틸드 부부도 초청을 받게 된다. 초청을 받아서 드레스가 필요했는데 남편이 비상금을 털어서 마틸드의 파티 드레스를 준비해주었다. 그런데 부인은 걱정이 많은 것이었다. 부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가난함과 초라함이 드러날 것을 걱정했다. 그래서 자신의 부자 친구에게 가서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를 빌려서 파티를 참석했다. 문제는 집에 돌아왔는데 그 목걸이가 없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마틸드는 똑같은 보석을 사다가 친구에게 갖다 주었다. 그 후 10년 동안 이 빚을 갚기 위해서 허드렛일을 하며 고생의 시간을 보낸다. 그런 사이에 마틸드가 폭삭 늙는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목걸이를 빌려 주었던 친구를 만나게 되고 아는 척을 하지만, 친구는 알아보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고 모든 일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친구에게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는다. 그 친구가 그 이야기를 듣더닌 그 보석 목걸이는 원래 가짜였다고 이야기 하고 그 소설은 끝이 난다. 이 소설은 사람들 속에 있는 허영과 자존심이 그 인생을 얼마나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쓴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살기가 쉽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이 마틸드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왜 그런가?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에 그렇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을 의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마틸드는 너무나 많은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과 인생에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떨까? 우리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백성이다. 그 구원의 은혜가 여전히 내 삶에 흐르고 있는가? 지난 한 주간의 내 삶에도 그 십자가의 은혜가 내 삶에 넘쳐났는가? 그 은혜의 풍성함으로 지난 한 주간을 달려왔는가? 우리는 말씀의 진리 앞에 선 사람인데, 그러한 사람답게 그 진리가 우리를 새롭게 했는가? 복음으로 다시 새롭게 되었는가? 정말로 내 삶과 내 인격이 새로워졌는가? 아니면 그 진리의 삶 대신 허영, 자존심 여기에 묶여서 마틸드와 같이 10년을 허송세월을 보내는, 이게 자기가 판단한 진리인줄 알고 살아가는 마틸드와 같이 내 삶이 그렇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았는가?

 

  오늘 본문은 목회를 하면서 세 번째 설교 하는 것이다. 2009년에 한 번 하였고, 작년 6월에 한 번 하였다. 하지만 선입견을 버리고 잘 따라와야 한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을 한다(21). 용서에 관한 본문이다. 형제를 얼마나 용서해야 하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설명하신다. 한 종이 있는데, 그 종이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졌다(24). 이게 어느 정도인지는 감은 잡고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의 값어치이다. 일만 달란트는 노동자의 품삯으로 따지면, 16만년을 한푼도 안쓰고 모아야 하는 돈이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에 있는 일만이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셀 수 없는, 수를 셀 수 없는 의미가 이미 일만 속에 들어있다.

 

  이 종은 주인에게 갚을 수 없는 빚을 이미 지고 있는 것이다. 종에게는 해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오직 방법은 주인에게만 있는 것이다. 이 종은 주인에게만 방법이 있는 것을 알까 모를까(26)? 문자적으로 보면 다 갚겠다는 것같지만, 엎드려 절하며의 시제를 보면 미완료형을 쓰고 있다. 그가 절하기 시작했다. 종도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빚이라는 것과 주인에게만 방법이 있는 것을 종도 인정하는 것이다.

 

  주인이 어떻게 했는가(27)? 중요한 동사가 2개 나오는데, 놓아보내며와 빚을 탕감하여 보내니인데, 용서라는 단어이다. 아페소이다. 떠나보내는 것, 없애주는 것이라는 뜻이다. 주인이 종에 대해서 명확하게 용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이 지금 종에게 하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용서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냐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이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가 용서를 입은 자가 우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인과 같이 우리를 명확하게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감격할 일인지를 알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이 용서를 받은 종이 어떤 일을 행했는가(28)?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있었는데, 옥에 가두게 된다. 그리고 이것을 주변에 있는 동료가 보게 되었다. 그리고 동료들이 주인에게 가서 이야기하게 된다. 그래서 주인이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을 감옥에 가두게 되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다.

 

  이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내 안에 질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왜 주인에게 엄청난 은혜를 받았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비교도 안되는 이 동료를 용서할 수 없었을까? 패역해서 그렇고, 인간이 죄인이어서 그렇다면 묵상이 되지 않는다. 이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공부하며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왜 우리의 삶에는 연결이 되지 않는가? 아는 것과 삶이 왜 갭이 생기냐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다 그렇다고 취급하는 순간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기 시작한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숙제가 된다.

 

  왜 우리가 앎과 삶에 차이가 생길까? 주인이 사실은 용서를 했을 때는 자신에게 그런 사람에게 용서하라고 해준 것이다. 가만히 보면, 우리는 무슨 입장에 서있냐면, 철저하게 자기 입장에 서있다. 내 입장, 내 중심에서 해석을 한다. 상대의 입장은 보이지 않는다. 내 입장, 내 중심에서 바라보다 보니까, 그런 답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주인 앞에 섰을 때는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갚을 수 없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이다. 동일하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 갔을 때 자기의 입장이었다. 어디에 있든지 자기의 입장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주인 앞에서도 자기는 옳았고,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앞에서도 자기가 옳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당성으로 이 사람은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것 당연한 것이고, 일백 데나리온을 갚아야 하는 것도 정당한 것이다.

 

  (30). 우리의 성경에는 그러나가 빠져 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한다. 용서는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주인은 갚을 수 없는 종의 입장을 헤아려보면서부터 용서가 시작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나왔다는 것은 주인이 종의 입장에서 생각해봤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인이 종이 불쌍히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거기에서부터 주인의 용서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당성을 얼마나 부여하는지 모른다. 부부 사이에도 그렇다. 열심히 살고, 몸이 아프고, 바쁜 것 맞지만 몰라준다는 것이다. 이 순간 내 마음 가운데 상대를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내 마음의 분노 속에 상대방을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수많은 사람들을 가두고 있다. 날 이해 못하고, 내 입장을 모른다고 이야기 하면서 내 마음 속에 가두는 것이다. 앎과 삶의 갭을 어떻게 메꿀 수 있겠는가? 이 은혜는 언제 우리에게 흐를 수 있는가?

 

  자기를 비춰보는 사람이 가능하다. 앎과 삶 사이에 비춰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패역한 죄인이고, 얼마나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말씀 앞에 비춰봐야 한다. 비춰보면, 내 모습이 드러난다. 거울에 비춰보면 적나라하게 내 모습이 드러나는 것처럼, 거울만 보면 되는데 보지를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씀의 거울로 비춰봐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씀의 거울에 자꾸 나를 비춰보면, 내가 일만 달란트 탕감받는 사람인 것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은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이런 종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짐승은 생각하지 않고 본능대로 산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다. 그런데 이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 받지 않으면 본능으로 드러난다. 구별되지 않게 된다. 말씀으로 통제 받지 않는 이성은 본능이 된다. 말씀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서 통제 받게 하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이 앎이 삶으로 연결되는 것이 가능하다.

 

  내게 주어진 이 시간 속에서 내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나의 정당성으로 살 사람이다. 하지만 주인은 정당성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용서하고, 품고, 이해하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할 수 없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으시지만,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 주님이 내 죄를, 엄청난 죄를 용서하셨지만 그러나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이다. 우리의 실체는 계속 나의 정당성, 나의 입장 여기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자리는 그러나 허락하지 아니하고의 자리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의 역사가 드러날 수 없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꼭꼭 숨기고 있다.

 

  기억하세요. 내가 누군가를 내 마음에 가둬두고 있는한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일만 달란트를 다 갚도록 하신다.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 받지만,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비춰보며 용서의 은혜, 죄사함의 은혜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 용서하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 비춰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 앞에 날마다 비춰볼 때 이사야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6:5).

 

  내가 마땅히 은혜를 받은 존재로서 은혜를 베풀어야 할 대상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가능하다. 말씀 앞에 날마다 내 자신을 비추면서 내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나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사람인지 깨닫게 된다.

 

#나무십자가교회 #주일설교

 

Posted by TECH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