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21절과 22절 말씀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24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죄 가운데 죽지 않을 수 있고, 어떻게 예수님이 가시는 그 곳에 나도 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찾지 말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으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할 오늘 하루의 시간 동안 나는 주님이 계신 곳만 찾으며 가져야 할 믿음은 갖지 못한 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여서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가 결국에는 죄로 인해 죽고 말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신 이 하루의 삶을 헛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나는 다른 것만 찾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시면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고 사역하였는가? 내가 오늘 행한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학생들과 청년들에게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의 삶은 주의 얼굴을 떠나 살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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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본문에 예수님께서 명절에 드러내지 않고 유대로 가셨지만, 명절 중간에 이르러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배우지 아니하였음에도 글을 아는 것에 놀랐지만,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교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24절 말씀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 자신도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케 하신 일을 비교하여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여 불의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신 것도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었음에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구분하여 노여워하였다고 말씀하시며,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드러나는 행위와 목적은 두 가지 행위 모두 안식일을 똑같이 범하는 일이고, 또 목적은 율법을 지키며 사람을 위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노여워한 이유는 그 행위의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 행위가 과연 율법을 지키기 위함인지, 아니면 율법에 기록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인지 봐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예배, 큐티 등의 종교적인 행위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들을 행함으로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인지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예배 가운데, 그리고 말씀을 읽고 큐티하는 가운데 나의 죄가 드러나고, 깨달아지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깨뜨려지며 하나님 앞에 분수령적인 회개가 일어나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의 마음과 나의 삶은 죄악으로 달려가며 죄 가운데 머물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드러나는 행위, 즉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공의로 옳은 판단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내 삶에 말씀이 역사하시는지 아니면 말씀이 숙제와 같이 그저 하루 하루 채워나가기만 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말씀이 역사하시도록 내 삶을 내어드릴때, 나를 보내신이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은채 행위로만 율법을 지키면, 그것은 자기의 영광만 구하는 일이고, 결국 불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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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이가 따로 있다 말씀하시며, 사람에게 증언을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증언하시는 경우는 다만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요한과 같이 눈에 보이는 증거에는 즐거이 있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게서 친히 증거하시는 증언에는 아무 음성도 듣지 않고 그 형상도 보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음으로 그 말씀이 우리의 속에 거하지 아니하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또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알고 그 성경을 연구하지만, 그 성경이 과연 누구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인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생이신 예수님께 오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다고 말씀하여 주신다.

  삶에 고난이 찾아오고, 사건이 생길 때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고, 큐티를 챙겨서 한다. 또 유투브나 여러 매체를 통하여서 유명한 목사님들의 말씀을 찾아 듣곤한다. 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내가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동기가 무엇인지 살피라고 말씀하신다.

  말씀 가운데 예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하여 지기 위해서 말씀을 큐티하고 연구하고 사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어떠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큐티를 하고 있음을 보게 하신다. 그러니 당연히 큐티에 너무나 포장이 많을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

  또 나의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보다, 여전히 그 설교 한편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자 했던 나의 모습과 나의 수고했던 것을 돌아보게 하시며 내 안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음을 지적하여 주신다. 설교를 마치고 주변 사람들의 인사와 평가를 내심 기대하며 바랐던 나였음을 보게 하시며, 말씀에 붙잡히고, 말씀에 사용되어지는 내가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이용하고, 예수님을 이용했던 나를 보게 하신다.

  예수님께서 증언하시는 유일한 동기와 목적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함이었는데, 나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하기보다, 나의 잘남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음을 보게 하신다. 이번 주도 말씀을 준비하여야 하는데, 나의 관심과 마음이 그 말씀을 듣는 심령이 구원받기를 간구해야겠다. 내가 전하는 메세지가 나의 삶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삶을 깨뜨리며 주께 나아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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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일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때가 곧 이 때, 바로 지금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결국에 우리를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하는 선한 일임을 가르치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부터 온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 나를 살게 하고,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그 말씀, 그 음성을 어떻게 해야 들을 수 있는가? 듣고 또 믿으며 사는 그 삶은 과연 무엇으로 가능한가? 

  23절 말씀에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을 공경하기 시작할 때 나를 살게하시는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되고, 결국에 그 음성은 나를 믿음으로 인도하여 가신다.

  내 안에 드러나야할 공경함의 모습은 무엇인가? 19절 말씀에 우리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는 것도 내가 듣고 싶다고 듣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일어나는 것도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로 하여금 듣게 하시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믿음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내 안에 내 스스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하는 그 공경함이 있는가? 아침에 말씀을 읽고, 큐티를 하는 가운데 '말씀하소서, 듣겠습니다.'의 공경함이 있는가? 오히려 나는 공경함으로 말씀 앞에 앉기보다, 여전히 내 힘으로 뭔가를 찾아내고, 내 생각과 내 방법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함이 내 안에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듣게 하지 않으시면 들을 수 없는 나임을. 겸손히 주의 말씀 앞에 머물지 않으면 결국에는 살 수 없는 나임을 깨닫게 하신다. 겸손히 말씀 앞에 나아가며, 또 말씀이 들릴 때에 감사함이 내 안에 있기를 기도한다. 말씀이 나를 살게 하신다. 말씀 없이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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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리아 수가에서 만난 이 여인이 예수님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원했던 이유는 목마르지 않기 위함도 있었지마는 다시는 여기 우물가로 물을 길러 오지 않기 위함이었다(15절). 그런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신다(16절).

  예수님께서는 왜 이 여인에게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셨을까? 예수님은 이 여인의 삶의 죄와 아픔을 짚으시며, 너에게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18절)고 말씀하신다.

  이 여인이 다른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라서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오는 이유, 또 이 여인이 다시는 우물로 물을 길으러 나오고 싶지 않은 이유가 이 여인에게는 남편의 문제, 혹은 그 죄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 여인이 집 밖으로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는 일은 어쩌면 자신의 죄에 대한 수치의 자리로 나가는 일이었고, 자신 안에 있는 정죄감과 죄책감의 자리로 나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남편의 문제를 언급하시며 이 여인의 죄와 아픔, 수치와 정죄의 문제를 직면하게 하신다. 그 때 이 여인의 질문은 과연 내가 어디에서 예배해야 하냐는 것이었다(20절). 왜 이 여인이 예배의 장소를 묻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예배가 그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고, 부정해진 자신의 삶을 정결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여인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배가 필요했고, 어디서 예배를 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자신의 죄가 사해지는 예배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어디에서도 말고, 지금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23절)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자신의 죄를 직면하고 그 죄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 안에 있던 죄가 드러난다. 그리고 그 죄를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까지 갈 것도 없고 지금 그 죄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며 부정한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매일 큐티를 통해 나의 죄를 보게 하시고, 그 죄를 뒤로 미루지 말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회개하며 죄를 다루기를 원하신다. 지금 그렇게 예배하라고 내게 말씀하신다. 회피가 아니라 직면이고, 다음이 아니라 지금이다. 오늘 내가 하나님께 지금 여기에서 들고 나가야 하는 죄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직면하지 않고 회피했던 나의 삶을 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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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바리새인들에게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해명없이 유대를 떠나신다. 

  유대를 떠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데(3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시겠다고 하신다(4절). 그 길은 유대인들이 대부분 다니던 요단 동편 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하여 부정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야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 결국 예수님은 피곤하여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을 수 밖에 없었다(5절)고 말씀하신다.

  다른 유대인들은 가지 않는 그 길, 피곤하여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그 길을 예수님은 왜 가셨을까? 예수님은 그곳에서 만나게 될 한 여인을 위해 그 사마리아에 가셨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바깥으로 출입하지 않는 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녀야하는 여인이었고, 예수님은 그 부정한 사마리아인일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 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그 여인을 위해 피곤하기까지 수고하셨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에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아셨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는 상종하지 않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시의 관습과 이해를 뛰어넘어서 물을 달라하시며 말을 거신다.

  그리고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냐고 묻는(9절)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10절)고 말씀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분임을, 사마리아 여인이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것의 근원되시는 분임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시선과 마음은 예수님의 손에 있었고, 예수님 곁에 있던 우물의 깊이에 있었다. 예수님의 손에는 물을 담을 그릇도, 그리고 예수님 곁에 있는 우물은 너무 깊어서 자신에게 물을 줄 수 없다고 여인은 스스로 생각하며 여전히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런 나,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나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고자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 수가에 이르기까지,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을 수밖에 없도록 수고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의 손에 그릇이 있는지 없는지, 예수님 곁에 있는 그 우물이 깊은지 얕은지만 보며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채울 수 없을 것이라고 여전히 의심하는 나임을 보게 하신다. 

  예수님이 내게 주시고자 하는 것, 아니 이미 주신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그것이 내게 정말 필요하기 떄문에 그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오늘 목마르지 않을 한 그릇의 물만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 오신 예수님의 손에 아무것도 없음에, 예수님의 곁에 있는 그 우물이 깊음에 나는 실망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바라는 것이, 내가 살기 위해 갖고자 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어쩌면 예수님이 주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기 떄문에 여전히 나는 예수님의 그릇 없는 손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마셔야 하는 그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무엇일까? 나는 오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와 복음으로 충분히 살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의 풍요가 있어야만 살아가는 사람인가? 에수님이 주시는 그 물을 마시며 내 삶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피곤하기까지 수고하시는 예수님을 닮아 나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필요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오늘 하루를 보내야겠다.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시도록, 또 예수님께서 내가 섬기는 지체들의 모든 것되시도록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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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에서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면서 세례요한의 유명한 고백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이 담겨진 본문이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어쩌면 동일한 사역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면서 시작된다.

  22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거하시면서 세례를 베푸시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있고, 23절에서는 요한도 세례를 베푸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23절 말씀을 보면,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곳은 살렘 가까운 애논 이라는 곳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애노는 이라는 곳을 더 부연하여서 설명하기를 거기에 물이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22절에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동일하게 세례를 베푸셨다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그 곳에 물이 많은지, 적은지 또는 물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 세례요한의 사역에는 물이 많았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물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례요한의 사역이 위대했을지라도 세례요한은 자신이 28절에 고백한 것과 같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세례요한은 생수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그가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시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발거음이 세례요한을 향하기 보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님께로 향하기 시작한다. 26절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다 예수님께로 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때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깨달으며 이 사건 앞에서 자신의 마음과 사명을 굳건하게 지켜낸다.

  자신은 그저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이런 자신의 삶과 사역이 오히려 자신에게 기쁨이라 고백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이런 고백, 이런 삶, 이런 사역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분이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명의 근원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전하는 말씀의 근원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나는 그저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며,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케 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또 오늘도 내게 맡기신 바 된 사역 앞에 나는 이 마음이 있는가? 나는 이 때에 어떻게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섬기고 있는가? 생수의 근원이신, 내 삶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하루를 그저 지나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자.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역을 멈추자. 예수님이 맡기지 않은 일에 어떤 열심도 갖지 말자. 내 육이 무너져야 내 영이 살아난다. 아들에게 순종할 때,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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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게 된다. 또한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사람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이 왔으나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고, 빛으로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이유는 그 행위가 악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의롭다 여겨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신의 행위가 악한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빛으로 나아갔을 때에 자신의 그 악한 행위가 드러날까 염려하고, 또 그 악한 행위가 드러남으로 당하게 될 수치로 인해, 그리고 결국에는 멸망이 이를지 모르는 두려움으로 인해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 증언은 하나님은 그 악한 행위를 한 사람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빛으로 나아오는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고 영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악한 행위를 물과 성령으로 씻으시고 악한 나를 새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이것을 듣고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신다. 이미 내 삶을 향해 하나님의 선포된 구원의 증언들을 듣고 있지만, 또 그 구원의 표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내 앞에 있지만 여전히 듣지 못하고, 듣지 못하여 믿지 못하는,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지 않고 수치와 멸망을 두려워하며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여서 여전히 악한 행위에 머물고 있는 나임을 보게 하신다.

  밤중에라도 예수님을 찾아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하고, 영생을 얻고자 했던 니고데모와 같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마음이 내게 일어나기를, 빛으로 나아가 악한 행위를 끊어내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내게 이미 선포된 구원의 소식과 구속의 은혜를 누리는 내가 되기를, 매일 매일 나를 향해 증언하고 계시는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 내게 들려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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