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례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바리새인들에게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아무런 해명없이 유대를 떠나신다.
유대를 떠나신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데(3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 가시겠다고 하신다(4절). 그 길은 유대인들이 대부분 다니던 요단 동편 길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하여 부정한 사마리아 사람을 만나야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렀을 때, 결국 예수님은 피곤하여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을 수 밖에 없었다(5절)고 말씀하신다.
다른 유대인들은 가지 않는 그 길, 피곤하여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는 그 길을 예수님은 왜 가셨을까? 예수님은 그곳에서 만나게 될 한 여인을 위해 그 사마리아에 가셨다. 그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바깥으로 출입하지 않는 시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녀야하는 여인이었고, 예수님은 그 부정한 사마리아인일 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 중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그 여인을 위해 피곤하기까지 수고하셨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에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이 어떠한 사람인지 아셨을 뿐만 아니라 이 여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는 상종하지 않는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시의 관습과 이해를 뛰어넘어서 물을 달라하시며 말을 거신다.
그리고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냐고 묻는(9절)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10절)고 말씀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분임을, 사마리아 여인이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것의 근원되시는 분임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의 말을 들은 사마리아 여인의 시선과 마음은 예수님의 손에 있었고, 예수님 곁에 있던 우물의 깊이에 있었다. 예수님의 손에는 물을 담을 그릇도, 그리고 예수님 곁에 있는 우물은 너무 깊어서 자신에게 물을 줄 수 없다고 여인은 스스로 생각하며 여전히 예수님을 의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그런 나,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나에게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시고자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 수가에 이르기까지, 피곤하여 우물 곁에 앉을 수밖에 없도록 수고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의 손에 그릇이 있는지 없는지, 예수님 곁에 있는 그 우물이 깊은지 얕은지만 보며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채울 수 없을 것이라고 여전히 의심하는 나임을 보게 하신다.
예수님이 내게 주시고자 하는 것, 아니 이미 주신 것은 무엇일까? 예수님은 그것이 내게 정말 필요하기 떄문에 그것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오늘 목마르지 않을 한 그릇의 물만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 오신 예수님의 손에 아무것도 없음에, 예수님의 곁에 있는 그 우물이 깊음에 나는 실망하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바라는 것이, 내가 살기 위해 갖고자 하고 필요로 하는 것이 어쩌면 예수님이 주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기 떄문에 여전히 나는 예수님의 그릇 없는 손만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마셔야 하는 그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무엇일까? 나는 오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와 복음으로 충분히 살아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세상의 풍요가 있어야만 살아가는 사람인가? 에수님이 주시는 그 물을 마시며 내 삶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넘쳐나기를 기도한다.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피곤하기까지 수고하시는 예수님을 닮아 나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필요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전하는 오늘 하루를 보내야겠다. 예수님이 나의 전부가 되시도록, 또 예수님께서 내가 섬기는 지체들의 모든 것되시도록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