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님께서 캄보디아로 전도여행 떠난 주간이어서 주일예배를 제가 섬기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교회가 함께 하고 있는 큐티인 본문으로 정해서 설교 나눴습니다.
시편 107편을 우리가 어제부터 큐티하고 있는데, 어제, 오늘 읽고 큐티하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셨을 겁니다. 먼저 6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밑으로 내려와서 13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내려와서 19절 말씀을 보시면,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라고 기록합니다.
그 다음에 또 내려와서 오늘 읽은 본문 28절에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문장이 4번 반복이 됩니다. 그리고 똑같이 4번 반복되는 문장이 또 나옵니다.
이번에는 8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입니다. 그리고 15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똑같습니다. 또 2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 또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31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입니다.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후렴이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후렴입니다. 노래가 그렇습니다. 우리 찬송가도 그렇습니다. 1절을 부르고 후렴을 부르고, 또 똑같이 2절을 부릅니다. 가사의 내용은 다르지만 다시 반복되는 후렴이 있습니다.
오늘 시편 107편은 계속해서 반복되는 후렴구처럼 여기 근심 중에서 사람들은 간구하고 또 여호와의 인자하심, 그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을 찬송하라고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지금 이야기합니다. 늘 노래가 그런 것처럼 1절, 2절, 3절, 4절 나올 때는 조금씩 다르지만 한 노래이기 때문에 같은 주제입니다.
오늘 이 노래의 주제는 고통이고 근심입니다. 여러 가지 일들로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1절에서는 광야입니다. 광야에서의 주리고 목마름이 있습니다. 당연히 고통이고 근심입니다. 2절이 말하는 어려운 상황은 포로로 잡혀가는 겁니다. 자유를 빼앗기고 여기저기로 끌려 다니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 삶, 고통과 근심입니다.
오늘 또 시편 107편의 세 번째, 3절에 나오는 어려움 그 고통은 다른 것 아니고 질병입니다. 여기 보면, 눈이 어두워집니다. 그리고 밥 먹기가 싫고, 밥맛이 떨어지고, 사망의 문에 가까워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하는 그런 질병입니다. 역시 고통이고 근심입니다.
그리고 오늘 4절은 바다입니다. 풍랑 이는 바다입니다. 사람들이 어쩔 줄 모르는 그 힘들 앞에서 아득해지고, 정신이 혼미해지고, 몸은 흐트러지는 그런 상황들입니다. 오늘 1절, 2절, 3절, 4절 계속해서 인생의 모진 풍파들 그 이야기들을 합니다.
오늘 이 본문, 그리고 시편 107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아주 모진 삶을 산다는 겁니다. 모두가 다 어렵게 삽니다. 어느 한 사람도 고통과 근심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남들이 다 잘 사는 것 같고, 나만 아프고, 나만 근심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이 있고, 근심이 있습니다.
인간의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입니다. 고통과 근심입니다. 사람들의 피부색이 다 다릅니다. 흑인과 백인이 다른 만큼 한국사람 안에서도 얼굴 색이 다 다릅니다. 누구는 얼굴 색깔이 검어서 걱정인데, 누구는 얼굴 색깔이 너무 하얘서 걱정입니다. 얼굴색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얼굴색이 다르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얼굴이 하얀 사람이나, 검은 사람이나 아니면 키가 큰 사람이나, 작은 사람이나. 작은 사람은 큰 사람을 굉장히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큰 사람은 큰 사람대로의 고통이 있습니다, 부요한 사람,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 고통과 근심이 없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공통점, 모두가 다 함께 가진 것은 어쩌면 고통, 그리고 근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그래서 하얀 얼굴을 가지시고, 어쩌면 유대인의 모습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 남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인생이 되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모두가 갖고 있었던 그 고통, 그리고 그 아픔, 그 근심의 자리로 오신 겁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연약함, 고통, 근심, 그 모든 것들을 다 함께 하십니다. 왜 흰 얼굴, 검은 얼굴, 아니면 백인, 흑인 그런 것이 아니라 고통과 근심이라는 모두의 공통적인 그 아픔을 포함하시고 그래서 제대로 인간이 되셨던 우리 대제사장이십니다.
오늘 시편 107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모두가 다 삶이 모진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여기 시편 107편에 각각의 사건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 모두가 다 고통과 근심이 있지만, 고통과 근심의 이유와, 아픔의 종류는 각각이 또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광야를 걷는 사람은 굶주림과 그리고 그 배고픔, 그것들이 문제입니다. 질병에 있는 사람은 먹는 게 없어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먹어도 토해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망의 문 앞에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질병으로 어려운 사람, 광야를 지나는 사람, 아니면 포로로 잡혀간 사람. 포로로 잡혀간 사람, 건강할 수 있지만 자유를 빼앗겼다는 것, 그리고 끌려 다닌 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 소망이 없다는 것에서 그 사람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근심과 고통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아픕니다. 하지만 각각이 다 다르게 아픕니다. 학생은 학생들의 아픔이 있습니다. 학생 때가 좋다고, 학생이 뭐가 근심과 걱정이 있냐고, 아니요, 학생들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무슨 걱정이 있냐고, 아니요, 젊은 사람 근심과 걱정이 있습니다. 죽을 만큼 청년들도 아프고, 죽을 만큼 우리 아이들도 아픕니다.
엄마, 아빠도 걱정과 근심이 많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걱정 많으십니다. 꼬마들도 걱정이 한 숨, 한 짐입니다. 그러니 할아버지만 한 숨 쉬지 않습니다. 꼬마들도 한 숨 쉽니다. 모두가 다 고통과 근심이 있고, 그 고통과 근심의 이유는 각각이 다 다른 겁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 설교의 제목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픕니다. 바다에 있기 때문에 바다에서 아픈 겁니다. 내가 있는 거기에서 내가 아픕니다. 고통과 근심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아픈 겁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바깥에서, 다른데서 아프려고 합니다. 내가 바다에서 아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테러의 소식과 자연 재해 그것은 굉장히 아파합니다. 하지만 내 삶에서의 아픔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삶의 자리에서 내 자녀들의 아픔과 한 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기 미국에 있는 젊은이들이 방황하는 것, 그것 보면서는 혀를 차면서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내 가정에서 아니 내 일터에서, 여기에 있는 아픔들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다는 것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 정신이 혼미하고, 내가 여기저기로 구르고 있다는 것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 삶은 별 것 아닌 것 같은 겁니다. 내 가정이 어둡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남의 가정의 문제 가지고는 참 안 됐다. 저래서 어떻게 살까 이야기합니다. 드라마 보면서 참 콩가루 같은 것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내가 바다사람으로 바다에서 아프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지 못합니다.
오늘 시편 107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여러 각각의 상황에서의 고통과 근심들, 그것들을 보여주면서 모두가 다 아프다고 그리고 각각이 다 아프다고 그래서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프다는 것들을 인정하라고 우리에게 지금 들이대는 겁니다.
내 가정에서 아픕니다. 내 가정교회에서 아프고, 내 교회, 내 일터에서 아픕니다. 바다 사람들은 어디서 아픕니까? 바다에서 아픕니다. 이 아픔과 절박함, 여기가 우리의 힘을 빠지게 만드는 겁니다. 오늘 28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해서 나오는 후렴처럼 나오는 28절 말씀에,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입니다.
‘그들의 고통에서’입니다. 다른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 그 근심입니다. 바다 사람은 바다에서 당하는 그 근심, 그 고통입니다. 그냥 애매한 아픔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당하는 아픔입니다. 내 고통 그리고 내 근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하러 교회에 나와서 먼저 봐야 하는 것은 내 아픔, 내 고통, 내 근심입니다.
세계에 있는 여러 문제를 우리가 같이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내 근심, 내 고통, 그 근심, 그 고통을 지금 여호와께 부르짖기를 소망합니다. 많은 세상의 역경들, 어려움들, 무슨 한국의 경제적인 불공정에 대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 사람은 바다에서 아픕니다.
무슨 우리나라의 경제의 불공정성이 다시 한 번 회복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 나쁜 것 아닙니다. 하지만 늘 그 기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다 사람은 바다에서 아프기에, 바다에서 해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내 근심과 내 고통이고, 내 앞에 있는 문제들입니다.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내가 내 몸으로 당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고통을 당하실 때 그냥 추상적으로 모든 고통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체휼하셨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그 아픔을 감당하신 겁니다. 내가 몸으로 아프고, 정말로 절박한 그 문제들입니다.
그런데 이거 말하기 싫어합니다. 애매하게, 뭉뚱그려서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오늘 여기 본문이 있는 것처럼 그 근심, 그 고통에서 부르짖고 그리고 그 근심과 그 고통에서 주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여러 가지 기도가 있겠지만, 아니면 이전에도 이미 그렇게 기도하셨겠지만, 다시 한 번 권하는 것은 지금 아픈 그 고통, 바로 그 고통, 바다 사람은 바다에서 당하는 그 고통, 그 고통을 내어 놓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그냥 애매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가정을 그냥 도와 달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내 가정의 고통이 뭔지 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디가 아픈지 분명히 말하는 겁니다. 어차피 모두가 다 아픕니다. 하지만 각각이 다르게 아프고,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픕니다.
내 몸이 아픈 겁니다. 내 몸이, 현실이 아픈 그 것, 그것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몸이 아프기 때문에, 몸이 아플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 나오는 것은 그냥 울음이고 신음입니다. 저기 먼데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뭔가 말할 수 있지만, 내가 아픈, 내 몸의 아픔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말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세계 저쪽에서 폭격이 떨어집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뭔가 할 말이 많습니다. 평화를 말하고, 뭘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몸, 내 집에 폭탄이 떨어지면 이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무슨 말이 나옵니까? 그 때 나오는 건 한숨이고, 울음이고, 신음입니다.
저 먼 곳에서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 사람들의 자유를 빼앗아 가는 것, 거기에 대해서는 뭔가 할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 내 몸을 붙잡고, 잡아가고, 내 몸을 때리고, 폭력이 내 몸에 오기 시작했을 때, 그 때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울음이고, 신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그리고 여기 하나님의 사람들, 많은 이들의 이 울음과 신음을 들으십니다. 저기 먼 문제에 대해서 뭔가 논하는 이야기,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서 들으실 겁니다. 여기 이 고통과 이 신음, 바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아파할 때 나오는 그 신음과 그 울음소리를 들으십니다.
울음은 그렇게 나옵니다. 현실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스마엘 그리고 그 어머니 하갈이 버려집니다. 아브라함이 버립니다. 나가라고, 이제 너는 나가야 된다고. 하갈은 어린 이스마엘과 함께 나갑니다.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이제 곧 떨어집니다. 광야를 걸어가는 데, 아들 이스마엘은 쓰러져 있습니다. 하갈은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마름은 전혀 멀리서의 일이 아닙니다. 광야를 걷고 있는 이 두 모자의 목마름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하갈은 웁니다. 이스마엘이 웁니다. 하나님이 이스마엘의 울음 소리를 들었다고 하십니다. 사실은 창세기를 보면, 이스마엘의 울음소리 보다는 하갈의 울음과 부르짖음이 더 간절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울음을 들었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의 아픔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신음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었답니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프기 때문에 바다의 풍랑에 정신없는 사람들이 무슨 삼각 파도가 어떻고, 무슨 일기예보가 어떻고, 일기예보의 정확성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거기는 정신없는 곳입니다. 혼미한 곳입니다. 바다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곳입니다. 울음과 그리고 비명과 그리고 신음이 가득한 곳입니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픕니다. 그리고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울며 신음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되어있냐면,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마, 울음일 겁니다. 그리고 신음일 겁니다. 그리고 또 한 단계 넘어가서 이 부르짖음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하는 간구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울음소리를 들으시고, 신음소리를 들으십니다. 영혼이 녹는다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지각은 혼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아프고 힘들고, 내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아픔 가운데, 내 영혼이 녹아 내리는 것 같습니다. 정신 못 차리겠습니다. 내 지각은 혼돈합니다. 앞 뒤 분간하기 어렵고 뭘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릅니다. 내 가정의 이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릅니다. 나에게 오는 이 폭력들을 내가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행하는 모든 비난들 정신없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경제적인 문제들, 여기서 어찌할 줄 모릅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신음합니다. 이 어려움 가운데 또 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사람들은 그들이 그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는답니다. 그런데 부르짖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답니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답니다.
얼마나 연약합니까?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만큼 연약합니다. 연약해서 흔들립니다. 하지만 또 얼마나 더 연약하냐면, 그 흔들리고,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뭐라고 빌어야 될지도 모를 만큼 연약합니다.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답니다.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친히 간구하신답니다. 탄식함으로, 그 이야기는 뭐냐면, 우리의 탄식에 합당하게, 우리의 탄식과 울음이 무엇인지 성령이 아셔서, 거기에 합당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도록 우리를 도우시고, 또 성령도 친히 간구하신답니다.
오늘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겁니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픕니다. 그리고 그 아픔은 우리를 정신없게 만듭니다. 울고, 신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하는 이 사람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이 도우셔야 합니다. 연약한 우리를 도우셔서 주 앞에, 단지 그냥 비명 지르고 우는데서 멈추지 않고,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건 한 단계 더 나아가는 겁니다. 출애굽기 보면 분명하게, 여기 있는 히브리 사람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하지만 시편은 조금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그냥 신음하고, 우는 것 하나 더 나아가서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신음하는 사람들, 그냥 탄식하는 사람들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하지만, 여호와께 부르짖기 시작하는 그 부르짖음에는 하나님이 당연히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줄 믿습니다.
신음과 탄식에도 귀를 기울이시는데, 자기의 이름을 부르며 간구하는 그 부르짖음에 여호와께서 침묵으로, 그리고 여호와께서 모른 척 하심으로, 거기에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침묵 대신에 이제 귀를 기울이시고,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바다 사람들은 어디에서 부르짖습니까? 바다에서 부르짖습니다. 부르짖으셔야 합니다.
신음하고 탄식하고 우는 소리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 부르짖으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르짖는게 당연하답니다. 부르짖는게 제일 쉬운 일 아니냐고, 그것 당연히, 어려우면 기도하는 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아닙니다. 고통과 근심 가운데 여호와께 부르짖는 것은 격려 받아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습니다. 보통 어떻게 합니까? 사람들이 그냥 울면서 끝날 뿐입니다. 그냥 웁니다. 울든지, 그 울음에서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울면서 당당하게 서 있지 못합니다. 눈물은 금방 통곡이 되고, 통곡은 어디로 갑니까? 저주하게 됩니다.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바다 사람이 바다에서 아파서 바다에서 모두가 다 주 앞에 부르짖는 것 아닙니다. 바다 사람들 바다에서 아프면서 저주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리고 미움만이 싹 틉니다. 내 삶에 아픔이 옵니다. 내 몸이 아플 정도로 저려옵니다. 참 인생이 모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원망하는 겁니다.
원망은 엄마를 향해서 아니면 내 자녀를 향해서 아니면 내 이웃을 향해서 아니면 그 원망은 나를 향해서, 내 과거를 향해서 그리고 내 미래를 향해서까지 저주합니다. 원망하고 저주하고 미워합니다. 내 삶을 미워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미워합니다.
내 자녀가 밉고, 남편이 밉습니다. 사장님이 밉고, 또 함께 일하는 내 동료가 밉고, 그리고 내 부하직원이 미운 겁니다. 그 사람들 저주합니다. 바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아플 때, 내 몸이 아플 때, 모두가 다 여호와께 나아와서 구하고 부르짖는 것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물 가운데 저주합니다.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그리고 비난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포기합니다. 자학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리고 자멸하는 사람입니다. 아픔을 어쩔 줄 모릅니다. 그리고 혼미한 가운데 사람들은 깡소주를 그냥 들이 붓습니다. 자학하는 겁니다. 그래서 속이라도 쓰렸으면 좋겠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쓰러져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아침에 머리라고 아프면서 일어나면 그게 그냥 뭔가 한 것 같습니다.
내 인생에 내 몸이 아프니, 내 머리도 아파야 할 것 같고, 내가 버틸 수 없으니 내가 스스로 자멸하는 그 길로 내어 놓는 겁니다. 될 대로 되라는 겁니다. 아무렇게나 살았으면 좋겠는 겁니다. 파괴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리고 그것들은 독기로, 악으로 굳어져 갑니다.
사람들에게 폭력으로 대하기 시작하고 절망으로 몸부림치기 시작합니다. 바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아프지만, 바다에서 모두 다 부르짖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여기 두 번째 단계가 힘듭니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아픈 것은 맞습니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플 겁니다. 자기의 현장에서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바다에서 아플 겁니다. 아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나고, 그래서 탄식이 나옵니다. 하지만, 이제 두 번째 대지서부터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 바다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 앞에 나와서 간구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냥 당연히 삶이 어려우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삶이 아프고 힘들었을 때, 주 앞에 나와서 부르짖느냐, 아닙니다. 남들 비난하는게 훨씬 더 쉽고, 저주하는게 쉽고, 미워하는게 쉽고, 내가 포기하는게 쉽고, 내가 자학하고, 자멸하고, 내가 악으로 그리고 절망으로 나아가는게 훨씬 더 쉽습니다.
아니면, 그냥 내가 내 살 길 찾아가는 겁니다. 주께 나와서 부르짖지 않습니다. 오늘 시편 107편이 우리에게 말하는 어쩌면 우리에게 들으라고 보여주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는 이 사람들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다는 겁니다.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에서 아파서, 신음하고, 울던 여러분들 오늘 이 아침에 주께 나아와 간구하고 부르짖으러 나오셨다면 정말 잘하신 일입니다. 어려운 결정을 하신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의 앞에 나아오고, 은혜 앞에 나아오고, 그리고 도우시는 분 앞에 나아온 것, 이것은 그냥 당연한 일 아니고, 가장 쉬운 일 하신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길로 나오신 겁니다. 올바른 길로 나온 겁니다. 오늘 이 아침에 우리가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복된 자리에 오셨습니다. 여기 나와서 우리는 간구하고 부르짖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고 놀라운 기적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다 사람들 바다에서 아픕니다. 바다 사람들은 또 놀랍게도 다른 길로 가지 않고, 그 바다에서 부르짖기 시작합니다. 이제 새로운 일들이 시작됩니다. 어떤 일들입니까? 오늘 본문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23절부터의 말씀입니다.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여호와께서 명령하신즉 광풍이 일어나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도다, 그들이 이리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그들의 모든 지각이 혼돈 속에 빠지는도다, 이에 그들이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아멘.)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승리합니다. 이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하는 소식입니다. 우리는 주께 나와 부르짖고,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복된 소식입니다. 그 부르짖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고, 그 잔잔함 가운데 우리가 기뻐하는 가운데 어느덧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의 손과 지혜가 우리를 소원의 항구, 우리가 바라던 그 곳, 안전한 그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듣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대하게 하는, 오늘 우리로 하여금 기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복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영접하시기를 소망합니다. 부르짖을 때, 주께서 평온하게 하시고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우리만 그렇게 믿는 것 아니고,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이미 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길을 걸어오며 간구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가 주시는 승리를 누리며 그리고 승리를 바라보며 싸우기 시작합니다. 싸웁니다. 내 몸이 아픕니다. 그리고 내 삶이 흔들립니다. 하지만 절망과 포기 그리고 자학과 자멸로 가지 않고, 기도하고 이 소망의 말씀, 이것을 믿음으로 붙잡고 싸워나가기 시작합니다.
일어서기 시작합니다. 삶의 변화 그것들을 누리며 기쁨으로 일어서고 싸워가고, 기쁨으로 일어서서 싸우는 가운데 어느샌가 주께서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셨음을 우리는 봅니다. 이 놀라운 기적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일이 이루어짐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주께 부르짖는 자들에게 주께서 놀라운 기적과 이사를 행하십니다.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고,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여 가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기적을 찬송합니다.
우리는 이 찬송의 소리를 이미 듣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마지막은 바다 사람들, 그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찬송합니다. 여호와의 행사와 기적이 바다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다에서 찬송합니다.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 이 사람들의 노래와 그 찬송이 여기 성경 가득히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경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도 이 바다에서 구원을 체험한 이 놀라운 승리한 바다 사람들의 노래, 그 노래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통과 근심, 그것들이 다 각각이나 이 사람들의 찬양은 늘 동일합니다. 여호와의 인자하심, 인생에 행하신 기이한 일들을 찬송합니다. 고통을 이긴 사람들, 그리고 고통 가운데 아름다운 노래로 그것들을 바꾼 사람들, 바다 그들이 아픈 그 곳에서, 바다 거기서 노래하는 사람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정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을 노래로 바꾼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고통 가운데 평안과 기쁨을 주시고, 간구하는 자들을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계시기에 이 노래와 찬양 이것은,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광야 사람들은 광야에서, 질병이 있는 사람들은 질병의 그 자리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간 그 자리에서, 이제 그 찬양이 울려 나오기 시작합니다.
바다에서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바다 사람들이 그 바다에서 찬양하기 때문입니다. 바다에서 찬송하기 때문에, 그 물결 이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높이는 소리와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그리고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들, 그 일들에 대한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여기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고통 가운데도 찬송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찬송 소리가 나옵니다. 몸이 연약하고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소리가 나옵니다.
우리 교회에 몸이 좀 불편하신 분들이 함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어려운 고통과 근심입니다. 그 분들은 그 곳에서 아파하시는 겁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아름다운 노래가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평온을 주시고,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거기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어려운 삶들 그리고 아픈 삶들, 바로 거기에서입니다. 내 가정이 가장 어렵습니까? 내 가정에서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내가 아픈 곳은 어디입니까? 내 직장일 겁니다. 내가 일하는 그 곳일 겁니다. 거기에서 내가 아프고, 내가 거기서 울고, 내가 거기서 탄식하고, 내가 거기서 주께 부르짖을 겁니다. 거기서 내가 승리할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노래할 겁니다.
내가 가장 아픈 곳이 어디입니까? 거기입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 때문에 아프고, 그리고 또 뭐 받아야 될 돈들 못 받아서 힘들고, 그리고 줘야 될 돈 못 줘서 힘든 곳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와서 나를 찌르고, 나를 힘들게 하는 곳입니다. 내가 지치는 곳이 거기고, 내가 아픈 곳이 거기입니다. 바다 사람은 당연히 바다에서 아픕니다.
장사하는 사람들, 장사하는 그 곳에서 아픕니다. 내가 어디서 부르짖습니까? 탄식이 나오는 곳도, 바다사람은 바다에서 탄식하는 겁니다. 바다에서 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바다에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바다에서 부르짖으세요. 그 직장에서 부르짖으세요. 평온은 어디로 옵니까? 그 바다로 올 겁니다. 기쁨은 어디서 누립니까? 거기서 누릴 겁니다. 찬송은 어디에서, 거기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가장 아픈 곳에서, 고통의 그 자리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될 줄 믿습니다. 고통을 노래로 바꾸는 사람들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이 그 포로, 거기에서 눈물로 탄식 가운데 결국은 노래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 생각해보시면, 그 유대인들은 어디서 아픕니까? 아우슈비츠 거기 수용소에서 아픈 겁니다. 거기서 아픕니다. 그리고 거기서 탄식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웁니다. 그리고 거기서 주께 부르짖습니다. 거기서 주께서 평온함을 주시고, 그들은 기쁨 가운데 거기서 노래합니다.
찬송 소리는 백성들 가운데 들릴 겁니다. 장로들의 그 높은 곳에서 그 찬송은 들립니다. 내 삶의 자리들입니다. 내가 바다 사람이기에 바다에서 아픕니다. 그리고 거기서 탄식하고, 거기서 부르짖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콘서트 장에 가서 아이돌 노래하는데 그 앞에 가서 탄식하며 부르짖지 않습니다.
아파하는 그 자리입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아플 겁니다. 가장, 총무는 어디서 아픕니까? 거기 가정교회에서 아픕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은 그 가정에서 아픕니다. 남의 가정의 일들로 아파하지 않습니다. 내가 아파하는 바로 거기입니다.
오늘 말씀입니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픕니다. 내가 거기서 아픈 것에 대해서 부정하기 시작하면 내 아픔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어쩌면 심각한 문제입니다. 아프지 않은 사람은 부르짖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승리를, 아름다운 노래를 그곳에서 부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른 데서 노래 부르기 시작하는 겁니다. 노래는 어디서 나와야 합니까? 바다사람들의 노래는 바다에서 나옵니다. 고통이 있는 거기가 아름다운 노래로 바꿔져야 합니다. 부활 생명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죽음이 있는 그 자리에서 부활은 일어나는 겁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곳은 다른 곳 아니고, 빈 무덤 거기에서 부활의 생명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은 저 멀리 어디 찬란한 백합화 피는 동산이 아니라, 내가 있는 이 어둡고 습한 바로 여기가 백합화 피는 동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곳입니다.
바다 사람은 바다에서 아플 겁니다. 그리고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부르짖고, 바다 사람들은 바다 거기에서 승리하고, 바다 사람들은 바다 거기에서 노래하고 찬송하기 시작할 겁니다.
이 삶이면 충분합니까? 네, 이 삶이면 가슴 벅찰만큼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제사장이, 체휼하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이 탄식하며 기도하는 그 일을 도우시고, 우리의 삶을 평온한 곳으로 인도하시고 우리로 노래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바다 사람들은 바다에서 아픈게 당연합니다. 내 아픈 것을 감추기 위해서 저 먼 곳의 아픔으로 아파하는 척하지 마시고, 여기 있는 내 아픔입니다. 한국교회의 문제에 대해서 아파하지 마시고, 여기 우리의 아픔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말고, 여기입니다. 한국 교육의 시스템이 아니고, 여기 내 자녀, 아니면 내 아픔입니다.
내 아픔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 그래서 정신 차리게 하시는 것,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내 자녀를 위해서 울 때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내 삶을 위해서 울 때임을, 내가 고통 가운데 주께 부르짖어야 될 때임을 깨닫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무것도 문제없는 냥, 아프지 않은 냥, 내 아픔을 감추기 위해서 남의 아픔, 먼 곳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 어리석습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바다 사람이 바다에서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이 아픔 가운데 성령님 탄식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나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하게 하셔서 나로 절망하고 자학하고 자멸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고 그런 것 말고, 주 앞에 나와 주께 부르짖게 해달라고.
내 아픔이 바다에서의 아픔이 나로 혼미한 가운데, 내가 정신이 아득하고, 그리고 지각이 혼돈한 가운데 나로 허망한 곳, 허무한 곳, 그리고 악한 곳으로 말고, 주 앞으로 나와 주께 부르짖게 해 달라고 성령님 앞에 도우심을 구할 때입니다.
주 앞에 나와 기도하고, 은혜 앞에 나와 기도하는 것이고, 진리 앞으로, 빛 앞으로 나아오는 겁니다. 악이 아니라 선한 것으로, 어두움이 아니라 빛 앞으로, 미움과 그리고 온갖 악함이 아니라 은혜 앞에 나아와서 주께 부르짖는 것. 이것 성령의 인도하심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는 다고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십니다. 물 붓듯이 부으셔서 우리로 예언하게 하시고, 꿈꾸게 하시고, 그리고 환난과 어려움, 세상이 흔들어지고, 뒤집어 지는 그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주 앞에 나와 부르짖게 하시고, 또 기도할 때 성령님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여 주셔서 주님이 우리에게 예비하신 그 잔잔한 물가로,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그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하여 달라고 기도하시고, 성령님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셔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감사의 찬송이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 내가 있는 그 바다에서 울려 퍼지기를, 그 노래가 들려오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일어섭니다. 다른 고통과 어두움에 있는 가정들, 그 사람들 일어섭니다. 저 어둠의 가정, 저 힘들었던 가정에 이제 그 고통이 아름다운 노래로 바꿔져서 울려퍼지기 시작할 때, 그 노래는 백성들 가운데서 들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소망의 노래를 듣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거기에 끌려서 일어섭니다. 이 땅에 복이 되게 하시고, 많은 이들을 복되게 하는 삶은 그렇게 이루어 질 겁니다. 바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아파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놀랍게 역사하셔서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시고, 그들이 찬송하기 시작할 때, 많은 바다에 있는 사람들은 소망을 갖게 될 줄 믿습니다.
여기 모여 있는 저와 여러분들, 우리를 이 땅에 빛으로, 소금으로 보내셨습니다. 이 땅에 소망의 등불로 보내신 줄 믿습니다. 바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노래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내 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부르짖어 기도하고, 주의 놀라우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바다에서 누리고, 그 바다에서 노래하기 시작할 때.
내가 일하는 곳에서, 내가 공부하는 곳에서, 내가 장사하는 곳에서, 내가 맡은 책임이 있는 그 아픔의 현장에서, 내가 주를 노래할 때, 새 일이, 새 역사가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그렇게 해쳐나온 이가 부르는 노래들, 그 구원의 노래들, 높은 곳에서 울리게 하십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부르짖게 하시고, 나로 기적을 보게 하시고, 나로 노래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하실 때.
내 아픔을 보게 하셔서 눈물로, 탄식으로 기도하게 하실 것이고, 또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새로운 평안과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또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함께 하셔서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영혼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오늘, 그리고 한 주 우리의 삶 가운데 넘칠 줄 믿습니다.
영상은 링크로.. ^ ^
https://youtu.be/HAb7XeieC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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