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에서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이 되면서 세례요한의 유명한 고백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고백이 담겨진 본문이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어쩌면 동일한 사역을 하는 모습이 기록되면서 시작된다.
22절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 거하시면서 세례를 베푸시는 이야기가 기록이 되어있고, 23절에서는 요한도 세례를 베푸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23절 말씀을 보면,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곳은 살렘 가까운 애논 이라는 곳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애노는 이라는 곳을 더 부연하여서 설명하기를 거기에 물이 많았다고 이야기한다.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22절에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동일하게 세례를 베푸셨다고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그 곳에 물이 많은지, 적은지 또는 물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 세례요한의 사역에는 물이 많았다고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사역에서는 물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세례요한의 사역이 위대했을지라도 세례요한은 자신이 28절에 고백한 것과 같이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사람일 뿐인 것이다. 세례요한은 생수의 근원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그가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지만,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신 분이시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발거음이 세례요한을 향하기 보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예수님께로 향하기 시작한다. 26절에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이 다 예수님께로 갔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때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또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깨달으며 이 사건 앞에서 자신의 마음과 사명을 굳건하게 지켜낸다.
자신은 그저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이런 자신의 삶과 사역이 오히려 자신에게 기쁨이라 고백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고 고백한다. 어떻게 이런 고백, 이런 삶, 이런 사역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되시는 분이심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명의 근원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전하는 말씀의 근원되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나에게 이 일을 맡기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나는 그저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을 기억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성령을 한량없이 부어주시며,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케 하신다. 오늘 하루의 삶 가운데, 또 오늘도 내게 맡기신 바 된 사역 앞에 나는 이 마음이 있는가? 나는 이 때에 어떻게 청소년들과 청년들을 섬기고 있는가? 생수의 근원이신, 내 삶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하루를 그저 지나가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자.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역을 멈추자. 예수님이 맡기지 않은 일에 어떤 열심도 갖지 말자. 내 육이 무너져야 내 영이 살아난다. 아들에게 순종할 때,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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