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각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주는 장면에서 그 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그 땅의 소산물들로 자신의 양식을 삼으라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그 소산물은 단지 그 성읍에서 거주하며 일을 하고 있다고해서 자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성읍에서 거주하며 또 일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땅을 경작해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 땅을 경작해야, 즉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자라나게 해야 그 땅의 소산물을 얻을 수 있고, 그 소산물들로 그제서야 양식을 삼을 수 있게 된다.

  성읍에 그저 머물고 있다고, 또 그 성읍에서 일을 하고 있다고 저절로 양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경작하는 수고가 없이는 소산을 얻을 수 없고, 그 땅에서 양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지금 머물고 있는 곳에서 경작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가? 오히려 저절로 소산을 얻으며 그것으로 양식을 삼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은가? 내 손에 주어진 내 양식의 결과는 어떠한가?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소산이 생기기를, 양식이 있기를 그저 기대하는 마음이 아니라 경작하는 수고가 필요한 때이다. 그 수고가 없이는 내 손에 쥘 양식은 없다고 말씀하신다.

  또 그 땅의 중앙에는 성소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많은 소산을 얻기 위해서 수고도 물론 해야 하지만 그 중심에는 성전과 성소가 있어야 한다. 나의 수고의 중심에, 나의 헌신의 중심에, 나의 소산과 양식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어야 한다. 지금 나의 삶에 중심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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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절 말씀에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오늘도 나를 위해 하나님 나라에서 거처를 예비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비가 된 후에 다시 오셔서 주님께로 나를 영접하여 주실 것이라고, 그래서 주님 계신 곳에 나도 있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거할 수 있게 하는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 나라에 거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나를 위해 예비하고 계신 예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셔서 나를 영접하실 것을 믿는 일밖에 없다.

  그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근심으로 염려하는 하루가 아니라 온전한 신뢰를 주님께 드리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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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실 때에 선하게 지으셨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시며,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그 선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이 보이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까지도 이미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지으셨다고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나의 세상적인 가치관이 나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며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하며 낙심케 하여서 결국에는 감사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하였으니 그저 감사함으로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내 모습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나를 창조하시고 이때까지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면 버릴 것이 없는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연약함과 부족함을 말씀과 기도로 채우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만 거룩하여 질수 있다. 그래서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 거룩에 이르도록 말씀과 기도로 나 자신을 연단하라 말씀하신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나이지만 다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의 모든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둘 때 가능하다고 말씀하신다.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선하게 지으셨음을 기억하며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나를 정금과 같이 온전케 하실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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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사도바울은 에베소교회에 있는 디모데에게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이야기한다. 

  사도바울이 명한 이 교훈은 무엇일까? 본문 14절부터 기록된 우리의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때에 자신이 이전에는 비방자요 폭행자요 박해자였으나, 도리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직분을 맡기신 것을 기억해 볼 때, 에베소 교회에 있는 디모데, 어떤 이들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해서는 파선해버린 그 사람들에대해 디모데가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야기하고 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긍휼을 입었던 것을 기억하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것을 믿으며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는 것을 기대하는 그런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보다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충성되이 여겨서 직분을 맡겨주실때에 나를 향해 여전히 오래 참고 계심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나에게 맡겨진 사람들을 볼 때 그렇게 오래 참으며 은혜로 믿음과 사랑이 풍성하게 넘치도록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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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디모데로 하여금 에베소에 남게 한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어떤 사람들로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정말 가르쳐야 할 교훈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율법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며 불법한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전하는 사랑인데, 내 안에 그러한 사랑의 마음이 없이 나의 어떠함만을 드러내기 위해 선생이 되고자 했던 마음이 있음을 보게 하신다.

  사랑이 없는 율법,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전하지 않는 사역은 마치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과 같고,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끌어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동안 나의 사역 가운데 이 마음,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전하는 사랑의 마음이 과연 얼마나 있었는지 돌아보라고 말씀하신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라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이루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하루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내가 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지식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구원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도 나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평강과 긍휼을 전하는 이 날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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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 21절과 22절 말씀에,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곳에 너희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24절에서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어떻게 죄 가운데 죽지 않을 수 있고, 어떻게 예수님이 가시는 그 곳에 나도 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셨는지 찾지 말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믿으라고 말씀하여 주신다. 

  내가 믿음을 가져야 할 오늘 하루의 시간 동안 나는 주님이 계신 곳만 찾으며 가져야 할 믿음은 갖지 못한 채, 주님이 누구이신지도 알지 못하여서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다가 결국에는 죄로 인해 죽고 말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신 이 하루의 삶을 헛되게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 있음에도 나는 다른 것만 찾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소개하시면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오늘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살고 사역하였는가? 내가 오늘 행한 일을 하나님은 기뻐하실까?

  학생들과 청년들에게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자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나의 삶은 주의 얼굴을 떠나 살고 있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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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본문에 예수님께서 명절에 드러내지 않고 유대로 가셨지만, 명절 중간에 이르러 예수님은 성전에 올라가셔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배우지 아니하였음에도 글을 아는 것에 놀랐지만, 예수님은 내 교훈은 내것이 아니고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교훈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교훈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내가 스스로 말한 것인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24절 말씀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안식일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안식일에도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있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예수님 자신도 안식일에 사람을 온전케 하신 일을 비교하여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사람들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율법을 범하여 불의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온전케 하신 것도 그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었음에도 유대인들은 이것을 구분하여 노여워하였다고 말씀하시며,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드러나는 행위와 목적은 두 가지 행위 모두 안식일을 똑같이 범하는 일이고, 또 목적은 율법을 지키며 사람을 위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예수님께 노여워한 이유는 그 행위의 중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 영광을 위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그 행위가 과연 율법을 지키기 위함인지, 아니면 율법에 기록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함인지 봐야 한다. 내가 하고 있는 예배, 큐티 등의 종교적인 행위들이 정말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것들을 행함으로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인지 판단하라고 말씀하신다.

  예배 가운데, 그리고 말씀을 읽고 큐티하는 가운데 나의 죄가 드러나고, 깨달아지고, 그것으로 인해 나의 마음이 깨뜨려지며 하나님 앞에 분수령적인 회개가 일어나는지, 아니면 여전히 나의 마음과 나의 삶은 죄악으로 달려가며 죄 가운데 머물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드러나는 행위, 즉 외모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공의로 옳은 판단을 해야 한다.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마음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내 삶에 말씀이 역사하시는지 아니면 말씀이 숙제와 같이 그저 하루 하루 채워나가기만 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말씀이 역사하시도록 내 삶을 내어드릴때, 나를 보내신이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다. 죄를 회개하지 않은채 행위로만 율법을 지키면, 그것은 자기의 영광만 구하는 일이고, 결국 불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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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실 때,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말씀하신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는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셨던 표적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셔서 제자들과 함께 있는 곳까지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온 큰 무리들의 여전한 관심은 온통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 예수님의 능력에만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다른 복음서의 말씀에는 이들이 시장하였다고 기록하지만,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시장함을 보셨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먼저 이들의 필요를 아시고, 이들의 배고픔을 채우시며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 안드레를 통해 받으신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에게 그들의 원대로 나누어주시며, 그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큰 무리들이 이제 예수님께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말하였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의 자리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억지로 붙들어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 하였다. 결국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혼자 산으로 가셨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이시고, 이들을 배부르게 하셨을까? 그것은 이들로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속의 은혜를 누리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리들의 관심은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당장 자신들의 배고픔에만 있었고, 그 배고픔을 해결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에만 열광하고 있는 것이다.

  표적 뒤에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면, 한번 배부를 수는 있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떠나시게 된다. 사건을 만날 때, 또 그 사건이 우리의 원대로 해결되었을 때에 정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왜 그렇게 해결하셨는지, 예수님의 뜻과 마음이 무엇인지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결국 예수님은 떠나가게 되고, 무리들은 다시 배고픔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자리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오늘 나를 이곳에 왜 두셨는지, 왜 여기에 이르게 하셨는지, 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는지, 모든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 그리고 목적을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한 번 배부름에 만족하며, 들어야 할 구원의 복음은 듣지 못한채, 영접해야 하는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은 채 그대로 여전히 무리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예수님을 경험하는 것은 작은 순종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내가 순종해야 할 작은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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