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족보와 계보가 기록되다가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서는 갑자기 족보가 아니라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 중에 있는 싸울 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겨 싸움에 익숙한 자의 수가 4만 4천 760명이라고 기록한다. 족보를 기록하다가 갑자기 싸움에 익숙한 자의 수를 왜 기록했을까?

  그것은 지금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전쟁의 위험 가운데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누구인지, 얼마나 많은 군대가 그들에게 쳐들어왔는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요단 동편 땅 역시 비옥한 곳이었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들이 그 땅과 그 땅에 있는 두 지파 반의 이스라엘 민족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을 위협한 대적의 수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21절 말씀을 보면, 두 지파 반이 빼앗은 짐승이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았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포로로 사로잡은 사람의 수가 10만이나 될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한 자도 많다고 이야기하니, 얼마나 많은 군대가 이들을 치기 위해 왔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수의 군대를 겨우 4만 5천명이 채 되지 않는 군대의 수로 이겼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20절 말씀에, 그들이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다고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22절 말씀을 보면,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나고 그런 환경 가운데 처했을 때, 우리는 당연히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그 위험과 상황 가운데에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은혜의 다음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방 민족들과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얻었을 뿐만 아니라, 23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번성케 하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의뢰하고, 부르짖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이 기록하는 것은 용감하고 유명한 족장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들의 힘으로 그 땅의 번성을 누리고, 더욱 번성케 하려는 태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마치 간음한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였다고 고발하신다.

  간음하듯 범죄한 두 지파 반의 결과는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손길로 말미암아 그들이 사로잡히고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로 옮겨지는 결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지만, 그 땅에서 오늘 까지 거기에 있었다고 기록하면서 여전히 살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깨닫게 하신다.

  어려움에 있을 때, 또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실 때, 하나님께서 많은 대적을 물리치실 때,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을 베푸시는 주의 손 끝이 아니라, 나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 비추는 하나님의 영광의 그 빛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간음하듯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을 수 있다.

  또, 하나님이 옮겨가게 하실 때에는 옮겨가야 한다. 그것이 삶의 결과인 것이다. 옮겨가면 거기서 살게 하신다. 번성은 누릴 수 없겠지만 살게 하신다. 그 은혜, 100% 옳으신 하나님임을 신뢰해야 한다.

Posted by TECHNO-T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아들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으심 받은 오랜 시간동안 사울을 피해 다녔지만, 그 시간을 지나 이제 다윗은 아브라함때부터 사라를 장사지내며 자신의 선조들이 묻혀있는 땅 마므레 곧 헤브론 땅에서 유다의 왕이 되고, 헤브론 땅에서 7년 6개월 동안 유다 지파의 왕으로서 보내고, 또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한 준비의 시간을 갖게 된다.

  그러나 오늘 다윗의 혈통, 다윗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사실은 다윗이 헤브론을 다스리는 그 7년 6개월의 시간동안 6명의 아들을 낳게 되는데, 문제는 그 6명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모두 달랐다는 것이다.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 갈멜 여인 아비가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학깃, 아비달 그리고 에글라까지 모두 6명의 여인의 이름을 기록하면서 다윗에게 6명의 아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다윗에게는 정치적인 힘이 약했기 때문에 이웃 나라들과 정략적인 결혼을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굳세게 했을 수 있지만, 6명의 아내를 설명하는 구절 중에 왕의 딸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셋째 아들인 압살롬을 낳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한 명인 것을 볼 때, 다윗의 이런 결혼 생활은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만은 아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헤브론에서의 7년 6개월의 시간을 보내고 예루살렘으로 간 다윗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암미엘의 딸 밧수아, 밧세바의 이름과 밧세바 사이에서 낳은 4명의 아들들이 기록되어 있다. 밧세바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이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였던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를 우리야를 전쟁에서 죽게하며 빼앗아온 불륜 사건이고, 다윗의 범죄 사건의 가장 절정에 있는 사건이다.

  헤브론에서의 6명의 아내와 예루살렘에서의 밧세바까지 이어져 오는 다윗의 삶을 볼 때, 다윗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무엇보다 자신의 욕정을 위해 많은 아내를 얻었고, 그 아내들을 통해서 아들들을 얻은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런 다윗의 욕심과 욕정은 끊어지지 않은채 예루살렘에서 밧세바 사건을 통해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오늘 다윗의 혈통, 다윗의 족보의 마지막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많은 여인들을 통해 얻은 아들들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런 삶, 자기의 욕심과 욕정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멈추게 하시기 위해 밧세바와 사이에 얻은 첫번째 아이를 데려가시는 심판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암논과 다말 사건을 허락하셨고, 또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허락하셨다. 과연 그 사건들을 통해서 다윗의 삶이 어떻게 다뤄졌는지, 다윗의 삶이 어떻게 새로워졌는지는 더 깊은 묵상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은 자녀들의 사건을 통해서 다윗을 연단하시고, 다윗의 삶을 만져 가셨던 것을 보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다윗의 지속적인, 마치 중독과 같은 그런 욕심과 욕정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다윗을 떠나지 않으셨고, 다윗 역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판하실 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며 회개했을 때에 하나님은 다윗의 혈통을 끊으시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을 통해 이어가게 하시는 은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회복의 역사를 다윗의 가계 가운데 행하신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바로 서며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한 왕으로 서 있었지만, 그의 나중은 수많은 이방여인과 우상 숭배로 빠지게 될 뿐만 아니라, 솔로몬의 범죄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이스라엘 나라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어지는 죄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솔로몬의 이런 죄의 시작은 다윗의 삶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솔로몬이 다윗의 삶을 지켜볼 때에 자신의 욕심과 욕정을 채워가는 아버지 다윗을 따라 솔로몬 역시 많은 여인들을 들이며 그로 인해 죄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다윗이 자신의 삶에서 그 욕심과 욕정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들고나아가 회개하며 돌이켰다면, 그리고 그러한 돌이킴이 아들인 솔로몬의 눈에 보여졌다면 어떠했을까? 솔로몬을 그런 죄의 길로 인도한 것은 아버지 다윗의 범죄함이 아니었을까? 

  내 안에 다윗의 이런 욕심과 욕정과 같은 마치 중독된 것과 같은 죄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의 자녀가 그 모습을 보고 죄를 배우며, 죄의 길로 따라가고 있지는 않은가? 그래서 결국은 솔로몬의 마지막과 같이 죄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지는 않겠는가?

  오늘 내가 끊어내야 한다. 죄의 중독에서 벗어나고 돌이켜야 내 자녀가 살아날 수 있고, 멸망의 길로 가지 않을 수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말하고 가르치지 않는다고 해서 배우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끊어내야 하고, 내가 결단해야 하고, 내가 돌이켜야 한다.

Posted by TECHNO-T

  어제 말씀에 이어서 유다 자손의 족보 중 특별히 헤스론의 자손들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가 기록될 당시에는 부계사회였기 때문에 족보는 당연히 아들 중심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 맞다. 그래서 가정이나 가문에 딸이 누구였는지 기록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들이 없게 되면 당연히 그 족보는 끊기게 되고, 그 가문의 대는 끊어지게 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 30절 말씀을 보면, 나답의 아들 셀렛은 아들이 없이 죽었다고 이야기한다. 장자로 이어지는 족보 가운데 아들 없이 죽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가문의 대를 끊어지게 놔두시는 것이 아니라, 차남인 압바임을 통해서 아들 이시를 낳게 하시므로 그 가문을 이어가시고, 그 대를 계속해서 이어지게 하신다.

  또 본문 34절 말씀을 보면, 세산은 아들이 없고 딸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당시에 아들이 없는 것은 수치이고 고난이었던 때였는데 아들이 없는 것이다. 그 수치와 고난이 얼마나 컸던지, 31절 말씀을 보면, 세산의 아들은 알래라고 이야기하는데, 여기에서 알래라는 이름의 뜻은 '~이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진짜 아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딸의 이름을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지으면서 그 수치와 고난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국 세산의 대에서 끊어져야 하는 이 족보는 다시 애굽 종 야르하를 통해서 앗대를 낳으며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들이 없는 것도 수치이고 고난인데, 이제는 이방인을 데리고 와서 그 대를 이었으니 이것은 더 큰 수치이고 고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헤스론 자손의 족보를 기록하는 것을 멈추시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이어나가시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지막 55절 말씀을 보면, 야베스에 살던 서기관 종족 곧 디랏 종족과 시므앗 종족과 수갓 종족이니 이는 다 레갑 가문의 조상 함맛에게서 나온 겐 종족이라고 이야기하면서, 레갑 가문을 언급하는데, 이 레갑 가문은 예레미야 35장 19절 말씀에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라"는 놀라운 영광의 약속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은혜는 유다 자손 중 다윗의 계통에만 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다. 유다 자손을 통해서, 특별히 다윗의 계통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시며 구속사의 사역을 이루시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다른 유다 자손들도 동일하게 돌보시며,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의 삶을 이어가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순간마다 필요한 은혜들을 베푸시고, 구속사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내 삶이 특별해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맡은 사역과 나의 열매가 특별해 보이지 않더라도, 내게서 다윗이 나오지 않더라도, 내게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들없이 죽는 셀렛이고, 딸 뿐인 세산과 같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않으시고, 놀라운 영광이 약속을 주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압바임을 통해서 대를 잇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또한 아들이 없는 딸 뿐인 인생의 수치와 고난을 감내해야 하고, 애굽 종을 들여야 하는 인내와 수고가 마땅히 따라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내게 주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마땅히 수치와 고난을 당하고, 그 수치와 고난으로 인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내와 수고로 공동체를 이어나가는 사람인가? 오늘 내가 마땅한 인내와 수고로 세울 수 있는 공동체의 영역은 무엇인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약속을 받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그리고 그 약속이 꼭 나의 때가 아니더라도 수치와 고난을 잘 인내하고, 마땅한 수고를 하여서 공동체가 끊어지지 않고 잘 이어갈 수 있도록 신실하게 오늘 하루의 삶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TECHNO-T

  유다에게 아들을 낳아준 사람에 대해서 2명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고, 두 번째는 유다 자신의 며느리였던 다말이다. 유다는 이 두 사람, 수아의 딸과 다말을 통해서 에르와 오난과 셀라 그리고 베레스와 세라, 모두 다섯명의 아들을 얻게 된다.

  그런데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을 통해 얻은 아들 중,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말을 통해 낳은 아들 중 베레스를 통하여서 다윗에게까지 이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혈통을 잇게 하신다.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도,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도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관계는 아니었다. 수아의 딸은 이방인이었고, 다말은 유다의 욕심으로 인하여 음란함 가운데 만들어진 관계였다. 두 관계 모두 죄악 가운데 세워진 관계였지만,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통해 전혀 다른 모양으로 일하시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게 했을까?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에 대해서 성경은 특별히 다른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유다의 며느리였던 다말은 시아버지인 유다와 동침하기까지 모든 행위에 대한 기준이 명확한 것을 알 수 있다. 창세기 38장 말씀을 통해 볼 때에 다말은 지혜로운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창세기 38장 26절 말씀에 유다의 입술을 통해서 "그는 나보다 옳다"고 고백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말씀이 기준이 되고, 말씀의 인도함을 따라 순종의 길로 걸어가기 시작할 때, 죄악된 삶을 구속사적 은혜로 바꿔내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하신다. 그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다말을 통해서 보아스를 만날 수 있고, 보아스를 통해서 오벳을 만나고, 오벳을 통해서 이새와 그의 아들인 다윗을 만나게 됨을 깨닫게 된다.

  죄로 인해 넘어져 있을 때에라도 죄로 인해 절망하거나 좌절하여서 말씀을 듣기를 포기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포기하면 여전히 수아의 딸이 낳은 자손과 같이 죄악 가운데 거하게 되며, 그 끝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할 뿐 아니라, 망함의 자리에 이를 뿐이다. 

  하지만 비록 죄 가운데 넘어졌을지라도, 말씀 듣기를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 때에 다말을 통해서 구속사적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런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 이뤄가기를 멈추시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 주의 말씀 듣기를, 주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포기하고 멈추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도 연약하여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들어야 하고, 순종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내 삶이 가나안의 딸 수아의 아들들과 같이 죄 가운데 머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만 행하다가 멸망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다말과 같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구속사적 은혜가 머무는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Posted by TECHNO-T

질문하기

1. (34절) 왜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라고 했을까?

2. (35절) 왜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러라 라고 했을까?

 

묵상하기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리던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가 모세의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올 때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아기가 그리스도, 메시야임을 깨닫게 된다. 메시야가 이 땅에 오시면 모든 사람이 메시야를 환영하고, 메시야를 따르며, 메시야로 인하여 기뻐할 것 같지만, 누구는 그 메시야로 인해 패하게 되고, 누구는 흥하게 되며, 누군가는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방하여서 표적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 흥하고, 누가 패하는지, 또 누가 기뻐하고, 누가 비방하는지는 그리스도를 향한 나의 마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메시야의 오심이 주가 예비하신 빛과 영광으로 임하시지만, 주의 오심을 기다리지 않는 이에게는 비방이 표적으로 오실 뿐이다.

  겉으로는 주의 구원과 임재를 기다리는 것 같으나, 또 기도하며 입술로 고백할 때마다 주의 임재를 구하나, 실상 그 본심은 주가 임재하시면 드러나게 될 나의 본심과 나의 죽지 않은 옛자아와 또 그로 말미암은 나의 더러운 죄들과 그 죄로 말미암은 수치들이 드러날 것이 오히려 두려워 주의 임재를 오히려 염려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마음을 갖고 있는 나야말로, 주가 오실 때에 패하고, 또 비방할 사람임을 깨닫고 고백하면서 오늘도 주의 말씀이 칼처럼 나의 마음을 찌르시고, 내 마음의 생각을 드러나게 하심에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 번 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면서,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이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며, 어둠 속에 있는 나를 빛으로 불러 내시기 위함임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말씀이 내 안에 역사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려야 겠다.

 

적용하기

1. 다른 일들로 핑계 삼으며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잠잠히 주님 앞에 나아가 이미 드러난 나의 마음을 주께 고백하기.

Posted by TECHNO-T

질문하기

1. (8절) 왜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라고 했을까?

2. (16절) 왜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라고 했을까?

 

묵상하기

  아무리 춥고 양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다른 야생 동물로부터의 생명의 위협이 있다 할지라도 목자는 자기의 양떼를 위해 밖에서 밤에 지킬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키고 있는 그 양떼가 바로 자기의 양떼, 그들의 소유로 여기기 때문이다. 목자는 그렇게 목숨을 다해 자기의 양떼를 지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양떼는 그런 목자의 돌붐 가운데 머물러야 한다.

  그러나 반대로 양떼를 위해 한 시도 쉬지 않는 목자들의 자기 열심이 있다. 분명한 것은 목자 자신도 양들을 모든 어려움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고하며 열심으로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목자들에게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의 나심과 그 표적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였을 때, 그들은 자신이 밤새 지켜오던, 어쩌면 그들의 평생을 다해 지켜오던 그 양떼를 떠나게 된다. 양떼는 여전히 깊은 밤, 수많은 위험들 가운데 처해 있었지만, 그 상황과 환경과 형편은 변한 것이 없지만, 목자의 마음은 양떼를 떠나 예수님께로 향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빨리 가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그들이 원하고 기다린 일, 그 일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양들, 그 상황과 환경과 형편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내려놓고, 얼마든지 내려놓고 그 일의 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현장으로 달려가 나신 주님을 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당한 모든 일들을 마리아와 요셉에게 이야기하고, 또 주를 경배하는 그 시간들을 그 자리에서 보내게 되는 것이다.

  내 삶에 정말 내가 열심으로 돌봐야 할 나의 양떼는 무엇인가? 또 내가 나의 열심으로 내려놓지 못하고, 주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나의 양떼는 무엇인가? 또 내가 내려놓고 빨리 가야 할 주님 계신 그 자리는 어디인가?

 

적용하기

1. 가장, 총무, 마을장, 가정교회, SG세미나를 위해서 시간을 떼어 기도하기.

2. SG 세미나에 대한 소망과 기대, 그리고 오늘의 큐티를 가장, 총무들과 함께 나누기.

Posted by TECHNO-T

질문하기

1. (75절) 왜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라고 했을까?

2. (77절) 왜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라고 했을까?

 

묵상하기

  원수의 손에 있을때에 우리이게 있는 것은 그 죄로 말미암은 두려움이다. 구약성경의 많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듯이 죄가 있는 상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면, 제단 앞에서 그가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내 안에 죄가 있음을 알고도 주의 앞에 나아갈 때에는 두려움이, 특별히 심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자녀들에게 친히 오시고, 그 모든 죄를 속량하시는 분이 계시다고 말씀하신다. 주는 우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고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이 아니라, 성결과 의로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주의 속량을 받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언제든지 두려움 없이 주 앞에 나아가며 그는 성결과 의로 주를 섬길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성결과 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반드시 그 죄 사함의 구원이 있어야만 성결과 의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죄 사함의 구원은 죄를 깨닫고 고백하는 회개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 내 삶과 심령에 있는 죄가 드러나는 일은 나를 정죄하시고, 나를 씼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수치 가운데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죄를 맑히시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라고 말씀하신다.

  죄가 드러날 때, 그 죄를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 사함의 구원이 내게 임한다. 그 때 두려움 없이 성결과 의로 주를 섬길 수 있다. 이렇게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아 두려움없이 주를 성결과 의로 섬기기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깨달아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 마음이 내 삶에 역사하셔서 날마다 큐티 가운데 내 죄가 깨달아지고, 말씀으로 내 삶이 비춰지며, 나를 속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넘치기를, 그리고 내가 섬기는 주 앞에 서는 것이 성결과 의로 설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적용하기

1. 죄가 깨달아지고, 회개할 수 있도록 성령께 나의 삶과 심령을 내어드리며 기도하는 시간 갖기.

2. 죄 패를 새롭게 기록하기.

Posted by TECHNO-T

질문하기

1. (30절) 왜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고 했을까?

2. (27절) 왜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고 했을까?

 

묵상하기

  하나님께 은혜를 입으면 어떤 상황을 마주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처녀가 잉태한 것이 알려지면 생명이 위협을 받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마주하는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평강을 경험하게 된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감정의 기복이 일어나고, 또 여러 사람들과 만나면서 계획한 대로 일이 진행이 되지 않을 때를 만날 때 마음에 평강이 사라지고, 사람에 대한 원망과 상황과 현실에 대한 분노가 가득차는 것을 보게 된다. 그 때 임마누엘 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며, 그 상황과 감정 가운데도 함께 계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상황 그리고 모든 환경 가운데 빠짐없이 역사하시는 능력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신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인가에 따라 능력의 어떠함이 달라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내가 처하고 경험하는 모든 상황과 내가 느끼고 있는 모든 감정들 가운데 그리고 내가 계획하고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 내가 상황을 겪고, 관계를 겪으며 그 가운데 평강이 무너지고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해지며 분노가 차오르는 것은 그런 상황을 겪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기에 합당한 때를 보내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음은 능력의 그 말씀이 내게 들리지 않아서이고,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은 내가 말씀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이 능력이고, 말씀이 은혜이고, 말씀이 평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말씀 앞으로 나아가 내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적용하기

1. 감정의 문제, 상황의 문제, 일의 계획 모든 것을 들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 머물기.

2. 말씀을 읽고, 듣고, 암송하고, 연구하고, 묵상하는 오늘을 산다. 특별히 37절의 말씀 암송하기!

Posted by TECHNO-T